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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아사송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26-10-24 04: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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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려지고 지워진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뛸 줄은 몰랐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이십 년은 아주 긴 세월이었다. 전화를 받는다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오십 대였던 명우는 이제 일흔이 되었고 가즈미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 벨이 울리는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이름을 불러 명우인지 확인하면 그 다음은 또 무어라 한단 말인가. 인사를 해야겠지. 잘 지냈느냐고 묻고. 그리고 또 무슨 얘길 이어가야 하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막막한데 손은 어느새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지금 아니면 영영 버튼을 못 누를 것 같았다. 목소리만으로 그 소리의 주인이 명우라는 걸 알았다. 조금 더 탁해졌고 묵직해서 얼른 알아채기 어려웠는데도 가슴이 먼저 알아챘다.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데 그 오랜 시간을 망설였나 싶을 정도로 쉬웠다.
십년 전인가 명우에게 꼭 한 번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머뭇거리다 건 전화였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전화를 끊고 나자 바뀐 전화번호가 전송되었다. 앞자리가 010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영영 바뀐 번호를 몰랐을 거였다. 인연은 아무렇지 않게 멀어지기도 하고, 뜬금없이 만나지기도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도 가즈미는 縁は異なもの,味なもの 엔와 이나모노, 아지나모노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것이라는 말을 믿었다.
"차가워지는 어둠만큼 쓸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가즈미는 이십 년 전 그렇게 헤어지고 상처를 입었다. 무책임해 보이는 암묵이 서로 묵인된 것처럼 그는 떠났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언어와 환경이 다른 그의 나라로 갔다. 떠난 그와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 밤을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이탈처럼 여기는 것인지 묻지 못했다. 내상을 입은 것처럼 매일 마음이 쓰렸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만약 명우가 어떤 약속이나 행동을 한다면 그걸 받아 드릴 수 있었는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는지 가즈미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결정은 그 상황에 놓인 순간 서로의 눈빛과 가슴이 결정할 일이었다. 명우가 미웠다. 아니, 밉지 않아서 스스로 미웠다.
가즈미는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에치코유자와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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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가라오케 앞에 오래 서 있기도 했고, 그때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쌓인 눈 사이로 난 발자국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그리고 정자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그 밤의 그 발길, 숨소리, 들뜬 열망 같은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날이 가즈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차가워지는 어둠만큼 쓸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눈은 폭폭 내려 모든 걸 덮었고, 쌓인 눈 일부를 치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 창밖을 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면 새해 엽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흔적도 없는 의례적인 신년 인사를 담은 엽서였는데, 가즈미는 그 담백한 몇 문장 아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그러면 변함없이 흘러가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견딜 수 있었다.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가즈미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꼭 쥔 채로 명우를 불렀다. 아주 잠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라면 다시 올 거로 생각했다. 그는 나무를 연구하고, 그래서 더러 일본에 올 일이 있을 거라고. 오면 한 번쯤 연락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십 년이 흘렀다. 가즈미가 이름을 밝히자 이어지던 짧은 탄성. 그 숨소리에 정수리부터 찌릿했고 섬광 같은 것이 가즈미의 머리끝에서 가슴을 관통하고 흘렀다. 잠시 숨을 멈췄다. 뭐라고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미리 할 말을 준비했어도 소용없었을 거였다. 전화가 끊어지기라도 할까 봐 만나자고 했고, 약속을 잡은 건 기억했다. 전화기를 잡은 손이 땀에 촉촉하게 젖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기는지 스스로 대견했다. 흐려지고 지워진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뛸 줄은 몰랐다.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즈미는 이내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한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길과 살아갈 길이 거울길에 다 보인 듯했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지난겨울, 가즈미는 도쿄국립신미술관에 가서 이우환 전시를 봤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내내 일본에 살고 있었고, 세계적인 작가였다. 가즈미는 무언가 깊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 나오시마의 이우환갤러리에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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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들어서면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노란 '호박'이 베네세 해변을 배경으로 이 섬이 나오시마라고 알리듯 우뚝 서 있고, 안도다다오의 건축물,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의 '오픈 필드' 등이 대단한 작품이 있지만 결국 가즈미의 발을 붙든 건 이우환 작가의 돌과 철판, 혹은 콘크리트 조형물이었다. '관계항'이라 이름 붙인 작품들이었다. 무심하듯 놓인, 그러나 차갑지 않은 돌이 제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철판이나 콘크리트 기둥, 나무 등과 어울려 좋았다. 무엇보다 갈 때마다 전시 작품이 놓인 위치는 그대로인데 계절에 따라, 주변 풍경에 따라 매번 전해오는 느낌이 달랐다. 대체로 단순해서 고요했고 따뜻했다. 어린 시절 막내였던 가즈미를 무릎에 앉히고 아버지는 장난치듯 どんぐりころちゃん あたまは とんがって おしりは ぺっちゃんこ どんぐり はちくりしょ ぽーん!돈구리 코로짱 아타마와 통갓테 오시리와 펫짱코 돈구리 하치쿠리쇼 포-옹 도토리 고로짱, 머리는 뾰족하고 엉덩이는 납작하네 도토리 영차, 뿅! 노래를 불렀다. 머리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다독이고, 뿅, 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올리면 가즈미는 까르르 웃으며 또, 또, 또 해줘 했다. 아버지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에 뿅, 할 때면 퍼지던 아버지와 가즈미의 웃음. 분명 신이 났을 텐데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아련하게 그립기만 했다. 낮고 고요한 '관계항'처럼. 어느 때인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새의 지저귐이 돌과 철판과 가즈미를 이어주는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심한 돌과 철판, 콘크리트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도쿄국립신미술관의 전시는 17년만의 전시라고 했다. 미술관의 규모가 큰 만큼 이우환 작가의 회화부터 조형물까지 망라했고, 전기 기획까지 아예 작가가 맡아서 했다는 보도를 들었다. 전시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의 역작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즈미는 힘든 줄도 모르고 전시를 관람했다. 이런 기회가 또 올 거 같지 않았다. 또 올 거 같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즈미가 만나는 어떤 것들은 다시는 볼 수 없거나 만질 수 없었다. 가즈미에게 시간은 무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작품 하나하나를 새겼다. 그의 작품을 떠올리고 따뜻했던 어느 봄날을 무심한 듯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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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쪽에 자갈이, 가운데 길에는 길게 폭이 좁은 카펫처럼 은빛 스테인리스 철판이 깔려 있었다. 길 중간쯤에 큰 돌이 강판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었다. 은빛 강판은 그 돌과 주변을 선명하게 비췄다. <관계항-거울길> 앞에서 가즈미는 기어이 중심을 잃었다. 안내판에 쓰인 대로 자갈을 밟다가 거울처럼 보이는 강판에 올라선 뒤였다. 강판에 올라서자 조금 전까지 내디딜 때마다 자갈자갈 부딪치던 소리가 사라지고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한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길과 살아갈 길이 거울길에 다 보인 듯했다. 그리고, 거기, 명우가 있었다. 가즈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고, 그 바람에 돌이 와글거렸고, 놀란 주변 사람들이 부축했다. 한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가즈미는 겨우 미술관 한쪽에 있는 카페로 가 빈 의자에 앉았다. 숨을 돌리고 미술관의 부드럽게 휘어진 유리벽과 아직 헐벗지 않은 나무를 보며 명우를 떠올렸다.
이우환이라는 한국 작가의 이름을 듣게 된 순간부터 이 전시를 보러올 때까지 명우라는 이름이 가즈미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애써 꺼내지 않았다. 그 이름이 가즈미에겐 아주 오래된 책처럼 꺼내면 금방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이젠 펼치는 것도, 읽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그 책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책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어도 그 안에 든 어떤 것을 소중하게 여긴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그건 소중한 물건이었다.
'관계항-거울길'에서 와글거리던 자갈 소리와 한순간 단절되던 거울 위의 고요 속에서 불쑥 생의 어느 날, 눈 쌓인 숲속과 하얗게 부서지던 명우와 입김이 떠올랐다. 하얗고 뜨겁고 설레던 순간의 박제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데 그와의 관계가 이렇게 오래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 줄 몰랐다. 자갈길을 걸으며 어쩌면 그와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깨닫는 순간 가즈미는 생의 회한처럼 휘청거렸다.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보고 와서, 가즈미는 미루던 숙제를 해내듯 스위스 디그니타스에 이메일을 보냈다.
가즈미는 가끔 상상 했다. 그가 오랜 시간을 건너뛰어 전화를 걸어온다면, 그런다면, 정말 그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하는 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굳었던 마음이 말랑거렸고, 그런 마음을 한 발 물러서서 보며 이런 마음의 나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양진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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